09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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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트 때문에 사람 여럿이 (과외해달라고) 찾아왔었다. 추리논증이야 내가 가르칠 깜냥까지는 못 되지만, 언어이해나 논술 같은 경우야 뭐.. 평가원에서 출제하는 사람들이 다 그 나물에 그 밥들인데다가 내가 지금 당장 평가원에 출제하러 들어간대도 그 정도 혹은 그 이상의 문제는 충분히 내고 남으니까.. 하긴 뭐, 사교육 시장이라는 게 원체 능력이라고는 쥐한테 난 뿔 정도도 없는 애들이 사기쳐서 억대의 돈을 버는 곳이니까.

00학번부터 04학번까지 학번 분포도 다양했는데, 결국 한 명 빼고는 한 타임 정도 대강 요령만 알려주고 돌려보냈다. 어차피 일용할 양식+땡길 때 마실 수 있는 술값 이상의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다가, 이미 그 정도는 출제만 해도 넉넉하게 벌고 있다. 게다가 나보다 나이많은 사람들한테 '이거 3분 전에 얘기한 거잖아'라든가 '지난 시간에 분명히 알려준 거 왜 오늘 물어보니까 몰라?'라며 매 시간 갈구기도 그렇고(안 그러면 머리에 안 남으니), 딱히 그런 생산적이지 않은 일에 에너지 쏟기도 그렇고. 계속 맡아서 가르치고 있는 형 하나는 워낙 군대에서 2년 내내 도움 받은 것도 많고 해서, 학원 따위 다니는 걸 그냥 놓고 볼 수 없어서 받은 거고..

그런데, 글쎄, 변호사가 좋긴 좋은 걸까나. 생전 법과는 관계없는 공대생들마저 변호사 되겠다고 저렇게들 매달리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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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언제나처럼 L선생님과 퇴근길에 복분자주를 한 잔 했는데, L선생님은 내가 진짜로 선생님으로 생각하고 있는 분은 그분 한 분 뿐인 거잖냐고 말씀하셨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L선생님 포함해서 두 분인 것 같다. 선생님의 세상에 대한 까칠함과는 다른 쪽 극단에 서 계시는, 그래서 내게는 일종의 균형 감각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시는 분은 누가 뭐래도 L선생님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나저나 조만간 다음학기 핵교 조교를 하게 될는지 어떨지가 정해질 것 같다. 적어도 학교에서 핵심교양이라는 제도가 생긴 이래 학부생이 핵교 조교를 맡아 애들 글에 열심히 피바다를 만드는 일은 내가 알기로 전례가 없는 일인데, 꽤 재미있는 일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게다가 출제 시즌이 끝날 무렵 굳이 다른 일 하지 않더라도 일용할 양식을 학교에서 제공해 준다는 것도 제법 매력적인 일이고.
by 류현 | 2009/07/04 01:39 | 일기 | 트랙백 | 덧글(3)
칸트, 판단력 비판 中
"예를 들어 누가 1000명의 성인 남자를 보았다 하자. 이제 그가 비교에 의해 어림잡을 수 있는 규범적인 크기에 대해 판단을 내리고자 한다면, 상상력은 다수의 형상들을 서로 포개어놓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나에게 시각적 현시의 유비를 적용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가장 많은 형상들이 합일하는 공간에서, 그리고 그 자리가 가장 진하게 색칠이 된 윤곽 안에서, 길이에서나 너비에서나 가장 큰 체격과 가장 작은 체격의 양 극단에서 같은 거리에 있는, 중간적인 크기가 알려질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아름다운 남자의 체격이다. (만약 사람들이 1,000명 모두를 재어, 그들의 길이와 너비 각각을 합산하여 그 총계를 1,000으로 나눈다면, 똑같은 것을 기계적으로 얻어낼 수도 있을 터이다. 그러나 상상력은 그러한 형태들을 여러 번 포착함으로써 내감의 기관에 생기는 역학적인 효과에 의해 바로 이와 같은 똑같은 일을 한다.) 이제 비슷한 방식으로 이 중간적인 남자에게 중간적인 머리를, 이 중간적인 머리에 중간적인 코를, 그리고 등등을 구하게 되면, 이 형태가 이런 비교를 하게 된 지역에서 아름다운 남자의 규범이념의 기초에 놓인다. 그래서 흑인은 필연적으로 이런 경험적 조건들 아래에서 백인과는 다른 형태의 미에 대한 규범이념을 가질 수밖에 없고, 중국인은 유럽인과는 다른 규범이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중략) 규범이념은 결코 이 유에 있어서 미의 전체 원형이 아니며, 단지 모든 미의 소홀히 할 수 없는 조건을 이루는 형식일 뿐, 그러니까 한낱 그 유를 현시하는 데서의 적정성일 따름이다."

18세기의 인간이 이런 통찰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히 흥미롭다. 아니, 천재적이라는 수사 이상으로 적절한 표현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탁월한 통찰이다. 그리고 이 통찰은 20세기 후반의 인지과학에 와서야 현대 과학 기술의 힘을 빌려 확증된다. 아래 사진은 실존하는 인물의 얼굴이 아니라 무작위로 추출된, 백여 명이 넘는 백인 여성들의 증명사진을 통해 얼굴의 특징들을 '평균해' 만들어진 사진이다. 남녀를 막론하고 이 사진 속의 여성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지 않는 이는 없으리라. 그리고 이 '아름다움'은 정확히 칸트적 의미에서의 아름다움이다. "개념 없이 보편적으로 적의한, 그리고 필연적으로 흡족의 대상이 되는" 것.
by 류현 | 2009/06/29 23:27 | 단상 | 트랙백 | 덧글(0)
문체에 대한 감각
어제 문득, 학교 5년째 다니면서 만난, 한 손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머리가 좋은 사람 중 하나인 L형을 집에 불러 놀다가 든 생각이다. L형은 방에 꽃혀 있는 책들을 이것저것 빼 보면서, 문체만으로도 감동을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긴, 대학문학상 대상 받을 정도의 문학적인 감수성이 있는 사람이니 그럴 법도 하긴 하다.

반면 나는, 거의 모든 종류의 글을 '건조하게'밖에 쓰지 못하는 편이다. 내용과는 별개로 문체 자체에서 유려한 아름다움이 흩날리는 글들이 있는가 하면, 문장 하나하나에서 전율하게 되는 소름이 돋는 글들도 있다. 아니, 있다고들 한다. (그 사례로 내가 알고 있는 건 고작 번역서인 계몽의 변증법 뿐이다) 그런데 난 그런 글을 쓰기는커녕, 알아보는 감각조차도 매우 떨어지는 편인 것 같다. 이건 선천적인 감각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고, 내가 책을 몇 권 안 읽어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소설을 포함한 문학을 거의 읽지 않아서일 수도 있을 거다. 이제야 한국어를 좀 '정확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니까 정치한 글을 쓰겠다고 작정하면 A4한 페이지에서 비문이 세 개 미만으로 나오는 글을 쓸 수 있게 됐는데, (이것만 해도 쉬운 일은 아니다. 심지어 서울대 교수라는 분들이 쓴 글도 엄밀히 따지면 절반 정도는 비문인 경우가 많다. 특히 유학 오래 다녀오신 분들의 경우라면 더더욱.) 문체들을 알아보는 능력은 나이가 몇이나 더 먹어야, 그리고 그 동안 얼마만큼의 글을 읽어야 길러질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혹은, 선천적인 자질 문제라면 평생 얻지 못할 능력일 수도 있는 것이고.

여튼, 내가 문체에 대한 감각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도, 참 많은 글들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을, 혹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런 능력을 가진 L선생님 같은 분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L선생님은 종종 'oo도 인생에서 조금 더 큰 좌절을 제대로 겪고 나면, 글이 좀 촉촉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잘 모르겠다. 그런 문제인지 어떤지. 정작 촉촉한 글을 알아볼 능력조차도 없는지라. 게다가 올 여름방학에는 한문 문체를 가지고 뭔가 작은 결과물이라도 하나 내어 놓아야 하는 입장인지라.. 그걸 생각하면 좀 답답하기도 하고, 그렇다.
by 류현 | 2009/06/26 00:42 | 단상 | 트랙백 | 덧글(0)
새 앰프 도착.
http://blog.naver.com/avmin?Redirect=Log&logNo=70043394954

여기 나온 인티앰프를 방에 들여놨다.(저기 나온 스피커는 원래부터 있던 녀석이었고) 부밍이 확 잡혔고 해상도와 스테이징도 확 살아났다. 중저음의 탄력도 제법 괜찮고, 아주 저음으로 내려가면 교회당을 통째로 빌린 것 같은 파이프오르간 소리마저 난다. 아무래도 대편성을 완전히 소화하기는 여전히 무리지만, 적어도 이전보다는 훨씬 나아졌다. '앰프 하나 바꿨을 뿐인데' 말이다. 지금 방의 두 배 정도의 면적에 나무에 가까운 벽이었던 옛날 방에서 나던 소리보다 1.3253685배는 좋은 것 같다.

물론 고속터미널에서 30Kg에 달하는 물건을 대중교통을 이용해 집까지 혼자 실어나른 건 좀 많이 압박이었지만..; 에구 허리야;
by 류현 | 2009/06/20 22:25 | 음악 | 트랙백 | 덧글(2)
이루마 6집
나왔는지도 몰랐는데, 어느 새 나와 있었다.

이제야 조금씩 원숙해지고 있는 것 같다. '절제'의 미학, 그러니까 서정성이 완성되는 진정한 계기는 바로 절제라는, 그 원리를 조금씩 배워가고 있는 느낌이다. 쉬운 예로, 극한에 달한 슬픔은 절규가 아니라 처연함에서 드러나는 법이다.

여튼, 그래서, 배경음악.



듣기
by 류현 | 2009/06/15 23:04 | 음악 | 트랙백 | 덧글(2)
좌절로써, 혹은 좌절로서 완성된 이들
좌절로써, 혹은 좌절로서 완성된 이들
- 그 운명의 처연함에 부쳐

“그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그 준칙에 대해 네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는,
오직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
- 임마누엘 칸트


어느 산 속, 두 남자가 부둥켜안고 죽어 있다. 이미 차갑게 굳어 있는 시체는, 얼마 동안을 제대로 먹지 못했던 것인지 거의 뼈밖에 남아 있지 않다. 부귀영화와 일신의 안녕을 버리고 義를 찾아 떠났던 그들은 不義로 가득 찬 세상에서 더는 살 수 없다고 생각했던 나머지 산으로 들어갔다. 혹은 그래야만 했다. 그리고 고사리만을 캐 먹다가 굶어 죽기에 이른다. 그 죽는 순간에도 그들은, ‘폭력으로 폭력을 제거했으면서도 그 그릇됨을 모른다’고 不義를 질타했다고 전해진다.

漢의 수도, 당대에 가장 번성했던 도시 장안의 어느 집 안, 한 남자가 앉아서 붓을 들고 글을 쓰고 있다. 남자의 국부에서는 채 아물지 않은 상처가 곪아 고름이 흘러내린다. 그렇게 10년, 그는 130편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역사서를 탈고하기에 이른다. 義를 주장하다가 목숨을 잃게 될 위기에 처했던 그는, 죽음보다 더 치욕적인 형벌을 자처하여 살아남았다. 혹은 그래야만 했다. 그리고 그 역사서, 아니 최초의 역사대계(大系)에 不義에 대한 항거로 고사리만을 캐 먹다가 굶어 죽기에 이른 두 사람의 이야기를 서문으로 싣는다. 그리고 그는 그 서문에서 『論語』에 등장했던 질문을 반복한다.

그들은 원망했는가.

십 년이 넘는 시간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그 질문은, 바로 그렇기에 그 두 사람에 대한 질문일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그 질문은 굴원과 백이와 숙제를 경유해 사마천에게 와서 내향introversion한다. 그렇게 십 년이 넘는 고통과 치욕의 시간은, 怨이라는 글자에서 비로소 묵중한 절규로 터져나온다.

그는 원망했는가.

그런데 『論語』에서도 『史記』에서도 원망의 대상에 관해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그는, 혹은 그들은 무엇을 원망했던가. 자신을 그렇게 만든 자들? 혹은 不義? 그 무엇도 아니라면 그들이 원망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義 때문에 쓸쓸하게 산중에서 굶어 죽어간 이들이나 그마저도 할 수 없어 치욕을 감내하며 살아가야 했던 사람. 그들이 무언가를 원망했다면 ‘세상’이라는 기표는 그 대상을 지시하기에는 너무 가볍다. ‘운명’. 그 처연한 운명이야말로 그들이 원망했던 대상일 것이다. 그들이 무언가를 원망했다면.

그렇다면 그는, 혹은 그들은 원망했던가. 답은 ‘분명히 그렇다’이다. 그들이 신이 아니라 인간인 이상. 칸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감성계와 예지계 사이에 걸쳐 있는 존재인 인간은, 그렇기에 비로소 ‘의지’가 존재할 여지가 생긴다. 일신의 안위와 영달 등을 쫓는, 이른바 자연적 경향성을 거스를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의지. 그리고 그 바탕에는 ‘자유’가 있다. 흔히 백이, 숙제, 사마천을 ‘의지가 강했던 이들’이라고 평가하는데, 이는 칸트의 의미에서라면 대단히 적확한 평이다. 그러나 그 근저에 존재하는 것,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야말로 진정 자유로운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백이와 숙제가 제후 자리를 고사하고 고죽국에서 도망쳐 나왔을 때, 바로 그 순간 그들의 운명은 정해졌다. 그들은 주나라 문왕의 가신들이 든 칼에 떨어지는 이슬이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일어난 반전에 의해 그들은 義人의 칭호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자유로운 자들의 운명은 바뀌지 않는 법이다. 그들이, 그들의 자유로운 의지가 선택했던 것은,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운명이었다. 다만 그 실현이 지연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연된 운명은 더욱 철저하게, 한편으로는 처절하게 그 자신을 실현한다.

그 운명은 사마천에게서도 반복된다. 그가 조정의 환관들을 비판하고 이릉이 패전했던 책임을 그들에게 돌렸을 때, 그의 운명은 그 순간에 정해졌다. 그도 역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만 했다. 그러나 그 스스로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자처하고 살아남는다. 그렇게 십여 년의 세월. 지연된 운명 끝에 자신에게 던진 질문이 바로 ‘원망하고 있는가’ 였다. 운명을.

그 운명의 수레바퀴를 지연시키고 또 완성시키는 결정적인 요소가 바로 좌절이었다. 백이와 숙제도, 사마천도, 굴원도, 모두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큰 좌절을 맛본다. 역설적으로 그 좌절의 순간에 그들의 삶은 완성된다. 그리고 역사에 기록되어 아련한 빛을 낸다. 수천 년에 걸쳐.

감성계와 예지계 사이에 걸쳐 있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기에, 한 사람으로서 온 몸으로 받아내기에는 너무 가혹한 운명을 그들이라고 어찌 원망하지 않았으랴. 그렇기에 중요한 질문은 ‘그들은 원망했는가’일 수 없다. 정말 중요한 질문은, ‘그들은 진정으로 자유로웠는가’여야 한다. 그들이 굴리기 시작한 처연한 운명의 수레바퀴 속으로 조금씩 말려들어간 그들이지만, 그렇기에 그들은 자유로웠고, 또한 그렇기에 그들은 인간이었다. 원망조차 하지 않았으리라고 단정하는 것은, 인간인 그들에게는 너무 가혹한 처사다.

이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사람다운 사람이었다. 자유로운 의지를 가진 인간, 그리고 그 의지를 통해 자연적인, 혹은 동물적인 욕구를 극복했던 인간. 칸트가 이야기했던 ‘선-의지’라는 것이, 적어도 그들에게는 존재했던 것 같다. 義人인 그들에게는.


덧붙여. 그 유서에는 ‘운명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진정으로, 그것은 운명이었을 것이다. 그가 시작한 운명, 그리고 그것 때문에 그가 좌절해야만 했던 바로 그 운명. 또한 그 유서에는 누구도 원망하지 말라고, 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러나 그 자신조차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을까. 그도, 사람이었다. 진정으로 자유로웠던, 사람.



칼럼에 올릴지 말지 고민중인 글. 어찌 할 것인지 덧글로 의견 좀 달아주시면 감사...
by 류현 | 2009/06/13 13:40 | 단상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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